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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슬로시티 신안 증도 - 신안해저유물발굴기념비(100730)

한밭양반 2010. 9. 5. 21:28

 

 발굴기념비 공원으로 가는 길

 이곳에서 서북방 2750m(동경126도5분6초, 북위 35도1분15초) 바다밑에서 중국 원나라 시대의 많은 유물이 발굴 인양되었다. 이 해저발굴은 1976년 1월 어부가 그물에 건져나온 도자기를 신고함으로 인하여 시작되었다.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은 발굴단을 조직하여 해군의 심해잠수사가 유물을 인양하였다. 발굴기간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9개년간 계속하였다. 인양된 유물은 도자기 20,661점, 금속제품 729점, 석제품 43점, 동전류 28톤18kg, 자단목 1,017개, 기타 574점과 침몰한 선체였다. 이 발굴은 세계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집중하여 한국, 중국, 일본에서 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그 성과는 중국도자사의 원년을 새 정리하게하고 한국, 중국, 일본의 교역사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였으며 고대 무역선의 실체를 알게되어 이는 동양문화사 연구에 길이 빛날 업적으로 남았다. 수백년 해저에 잠든 문화사의 보고를 알려준 어부의 갸륵한 마음과 파도와 태풍에 시달리면서 발굴에 참여한 조사요원들과 23m가 넘은 캄캄한 심해의 급한 해류속에서 고난을 무릅쓰고 유물인양에 참여한 해군심해잠수사들의 그 정성과 노고를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오늘 세계 해저발굴사에 빛나는 신안 해저의 그자리를 길이 잊지 않기 위하여 빗돌에 새겨 그날의 일을 오래 도록 전하게 한다.

 1979부터 1984년까지 발굴에 참여했던 필자(허종행)와 그 가족(아내와 딸)함께 기념비 앞에서

 

 발굴단

 협조지원단

 해군 및 심해잠수사

발굴비문 

 

 

 

 

 

 

 

 

전남 신안군 증도면 방축리 도덕도 앞 바다(동경 126°05 '06 ", 북위 35°01 '15")에서 해저 유물이 발견 되었다. 

발굴 장소의 수심은 20m 이상이고, 해류가 탁류를 이루면서 급하게 흐르므로 시계()가 없는 해저이다. 1976년 1월, 이곳 어부의 그물에 중국 룽취안요[]의 청자()가 인양되어 매장문화재 발견신고가 있은 후, 이해 10월부터 문화재관리국이 주축이 되어 국립박물관·서울대학교·전남대학교·문화재연구소 등으로 발굴단을 구성하고 제1차 발굴을 시작하였으며, 유물의 인양 작업은 해군의 심해잠수부가 담당하였다. 이후 1984년까지 제11차 발굴이 진행되었다.

발굴 유물은 청자·백자·흑유()·백탁유()·잡유()·금속제품·석제품()·목제품()·칠기()·토기() 등이며, 그 수량은 2만 8000여 점에 달하였는데, 이 중 청자가 9,600여 점으로 가장 많다. 이 유물은 침몰된 거대한 목선()에 실려 있었다. 목선의 가장 밑바닥 부분에는 동전()이 가득 실려 있었는데, 1984년까지 약 20t이 인양되었다. 그리고 향목()으로 쓰거나 가구재()가 되는 자단목() 500여 점(약 8t)과 글씨를 쓴 목간() 300여 점 및 한약재()도 발굴, 인양되었다. 이들 유물은 상품()이 대부분이나, 선원들이 항해하면서 사용하던 일부 생활용품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인골()의 일부도 발굴되었다. 한편, 침몰선의 선체()도 분해, 인양되었다.

청자 중에 고려청자 3점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청자음각연당초문매병() 1점, 청자상감운학문대접(楪) 1점, 청자상감연당초문잔대() 1점이다.

그밖의 청자는 중국 저장성[] 룽취안요 계통으로 원대()의 작품이 대부분이고, 송대()의 기법을 보이는 청자도 있다. 종류를 보면, 모란무늬·용무늬 등이 새겨진 화병이나 일반병이 많고, 줄무늬·용무늬·모란무늬 등이 새겨진 항아리, 무늬가 없는 소문()·정병()·대반()·주전자·대접·접시·사발·잔·향로 등이다. 특히 '사사수부 공용(使)'이라 새긴 화문()접시가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이는 원나라 지방기관인 선위사사도원수부(使)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공용품()으로 보인다.

백자는 중국 장시성[西] 징더전요[] 계통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유약에 약간 푸른 색이 도는 청백자 계통과 흰 순백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순백자 중에는 징더전요의 추부계() 백자가 상당량 포함되어 있고 ‘복록(祿)’ 등의 글씨가 양각된 것도 있다. 종류에는 항아리·병·대접·접시·향로·주전자·잔·연적() 등이 있으며, 용무늬나 모란무늬·당초무늬가 새겨지기도 하고, 철반무늬[] 또는 철화()로 천록(鹿)이나 연꽃을 회화적으로 그린 것도 있는데, 이것은 모두 원대()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흑유()는 천목()과 일반 흑유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천목은 허난[] 천목 계통과 유사한 것이 있고 일반 흑유는 칠흑색()·흑갈색·다갈색 등이다. 흑유의 종류는 항아리·단지·잔·사발 등이다. 백탁유 계통의 화분()이 많고 백유흑화()의 항아리와 병이 있으며, 옹기 같은 단지들이 많다.

그밖에 금속제품으로는 은으로 만든 정병()·매병()·접시 등이 있고, 청동으로 만든 촛대·향로·거울·바라(악기)·자물쇠·주전자·세발두꺼비·수저·냄비·적자()·사발 ·인물상 등 종류가 다양하다. 돌로 만든 벼루·맷돌·동물조각 및 숫돌 외에 유리제품도 있고, 나무로 만든 용기들과 도자기를 포장했던 상자 및 불상 등도 나왔다. 철기는 잔이나 발()·벼루·쟁반 등이 있고, 백동정()도 많이 인양되었다. 한약재로서 초과()·호초(산수유·아출()·파두() 등이 있었다. 특히 동전은 오수전()을 비롯한 70여 종(······· · · · · · · · · · · · · · · · · · · · · · · · · · ·)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 가장 늦은 시기의 돈은 1310년에 제작된 지대통보()이다.

목간()은 물표()가 대부분인데 ‘지치 3년 6월 1일()’이라는 글씨가 나와 이 배가 침몰한 상한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해는 곧 1323년에 해당한다. 선체는 10개의 격벽구간으로 구성되어 비스듬히 침몰되어 있었는데, 늑골()은 너비 67cm, 두께 52cm의 거대한 송목()이었으며, 외판()은 늑골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께 약 12cm, 너비 40∼50cm의 판재가 12판씩 크링커식으로 강한 접착제를 사용하여 접착되어 있고, 그 외부에 또 두께 1cm 정도의 보호판이 붙어 있었다. 이 배의 앞은 사다리꼴이며, 복원치의 배 너비는 약 10m, 배 길이는 30m가 넘는 큰 규모의 목선이었다.

이 유물선은 중국 푸젠성[] 푸저우[]의 조선창()에서 철저한 고증을 거쳐 당시의 기법으로 중국인들의 손에 의하여 복원되어, '700년 전의 약속'호로 명명되었다. 복원된 유물선은 길이 31m, 너비 9m, 높이 10m의 목선으로, 1996년 7월에 당시의 항로를 따라 중국의 닝보[:당시의 ]를 출발, 목포와 신안을 거쳐 일본의 하카타[]에 이르는 뱃길 3,000km를 탐사하였다.

한편, 일본 유물로서 왜 나막신(게타)·일본도(청동거울·장기·칠기·도기 등 생활용구가 일부 인양된 것으로 보아 이 배는 당시 일본을 왕래한 중국의 무역선으로 추정되며, 1323년에 가까운 어느 시기에 침몰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방대한 규모의 해저유물들은 당시의 교역사와 동양문화사를 밝히는 데 중요한 자료로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보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침몰 선박(목선)이 인양되었다는 점이다. 조사결과 이 선박은 중국에서 건조한 선박으로 중국제 도자기 및 동전을 비롯한 동남아의 생약재 등을 싣고 중국을 출발해 일본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이 선박은 인양되어 목포해양유물전시관에 복원전시 되어있다.

보물을 건져 올린 바다가 보이는 방축리에 유물 발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목포해양유물전시관이 만들어진 것도 모두 증도에서 발견된 해저유물 때문이며, 당시 인양된 보물과 복원된 보물선도 그곳에 전시되어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글과 사진 : 허종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