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암자 속 어느 칠성탱 읽기[최춘호]

한밭양반 2008. 7. 15. 10:15
문화재칼럼
암자 속 어느 칠성탱 읽기 [최춘욱]

경상남도 밀양은 북쪽의 해발 932m인 화악산을 경계로 경상북도 청도군(淸道郡)과 접해 있는데 이 산의 남록(南麓)은 특이하게도 밀양시 청도면(淸道面)이다. 청도면 요고리 뒤편의 산허리와 산줄기를 타고 오르면 선경(仙境)에 다다란 듯 발아래로 운해(雲海)의 장관이 펼쳐지기도 한다. 하여 산 정상 가까이에 위치한 절 이름 또한 운주암(雲住庵)이라 명명되었는가 보다. 운주암은 표충사 말사로 사암의 명칭은 비록 암자이지만 사지 경관의 수려함이나 석축들이 연조를 지니고 있고 대웅전을 비롯한 대소 전각을 고루고루 갖추고 있어 유서가 깊은 편이다. 특히 이 암자의 칠성각(七星閣)에는 그림 화면 속 각각의 등장인물들에 관한 명칭들을 낱낱이 묵서(墨書)로 부기해 둔 흥미로운 칠성탱이 봉안되어 있기도 하다.

견본채색된 이 탱화의 전체적인 구도는 화면 중심부에 금륜(金輪)을 지닌 채 청연화좌(靑蓮花座) 위에 결가부좌한 칠성의 주불인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를 가장 크게 묘사한 후 그 좌우에 협시보살인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을 비롯한 나머지 등장인물상들을 좌우대칭 및 나름의 원근법을 가미하여 5열 횡대로 도열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세부적으로 조금 더 면밀히 살펴보면 주존 바로 아래쪽이자 화면 하단 중앙에는 독특하게 연주문(聯珠文)의 청색 원권(圓圈)을 형성한 후 주황색 바탕 위에 천도(天桃) 가지를 쥔 서왕모(西王母)와 석류를 든 천동(天童)이 있으며, 그 좌우에는 비교적 자유로운 시선으로 원유관(遠遊冠)을 쓴 채 도복을 입고 선 칠원성군(七元星君)들이 집홀(執笏) 또는 경책(經冊)을 펼쳐 보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각각의 칠원성군의 양쪽 가장자리에 묵서된 것에 의하면 좌측에는 탐랑(貪狼), 녹존(祿存), 염정(廉貞), 파군(破君) 등 1, 3, 5, 7의 사위성군(四位星君)을, 그 우측에는 거문(巨門), 문곡(文曲), 무곡(武曲) 등 2, 4, 6의 삼위성군과 함께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두광을 지닌 채 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이는 자미대제(紫薇大帝)이라고 한다.
둘째 열에는 주존을 향해 합장한 모습의 칠여래(七如來)가 묘사되어 있는데 일광보살 좌측에는 좌변여래(左邊如來) 삼위와 태상노군(太上老君)을, 월광보살 우측에는 우변여래 사위를, 화면 상단에 속하는 셋째 열의 향우측에는 삼태육위성(三台六位星)을, 향좌측에는 성군(星君) 2위와 월천자성(月天子星), 일천자성(日天子星), 존제(尊帝) 2위, 그리고 넷째와 다섯째 열에는 28수(二十八宿) 모두를 횡렬로 가지런하게 표현하고 있다. 청색으로 공간처리되어 있는 28수 후면 여백에는 서기가 군데군데 피어오르고 있고 화면 상단 가장자리 4군데에는 향좌측에서부터 남방(南方)의 진·익·장·성·류·귀·정(軫·翼·張·星·柳·鬼·井), 서방(西方)의 삼·자·필·묘·위·루·규(參·?·畢·昴·胃·婁·奎), 북방(北方)의 벽·실·위·허·여·우·두(壁·室·危·虛·女·牛·斗), 동방(東方)의 기·미·심·방·저·항·각(箕·尾·心·房·?·亢·角) 등 28수 별자리 각각의 명칭들을 친절히 안내하듯 묵서해 두고 있다. 칠성탱은 칠성신앙의 결정체로 조성된 후 조선후기 칠성각에 많이 봉안되어 있지만 운주암 칠성탱처럼 각 등장인물상 옆에 방격선(方格線) 두른 후 각각의 명칭을 부기한 것은 흔하지 않다.
우리나라 칠성신앙의 기원은 언제부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삼국지》 위지(魏志)에 영성(靈星)을 신앙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의 기록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조정에서 태일(太一)을 지낼 때 칠성신을 제사지냈고 무속에서도 칠성신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규보의 《노무편(老巫篇)》에서는 칠원성군을 모셨다는 내용도 있다. 또한 태일초(太一醮)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점에서 이 칠성신이 기우의 대상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수명장수 및 재물과 소원성취의 기능 또한 관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우리나라의 칠성신앙은 도교의 전래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점차 불교 속에 습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사찰의 불공의식 중 칠성청(七星請)에 의하면 치성광여래와 북두칠성은 지혜와 신통이 불가사의하고 중생의 마음을 두루 알며 갖가지 방편을 모두 쓰면서 중생들의 한량없는 고통을 멸해줄 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하늘에서 빛을 비추고 인간에게 수복을 점지해준다고 한다.
운주암 칠성탱은 적색과 녹색을 위주로 하여 조선말기에 등장하는 밝은 청색을 요소요소 가미하고 있는 19세기 조선말기 탱화의 색채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공간감을 부여하기 위해 묘사되어 있는 구름 또한 백색과 녹색, 자색, 청색 등을 사용하여 채색하고 있으며, 불단은 담묵으로 무늬목을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 칠성탱에는 화기란(畵記欄)을 따로 마련해 두고 있지 않아 정확한 제작연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현재 이 탱화는 아래에 약간의 변색이 있고 화면 군데군데 그을림과 더불어 배면이 좀이 슬어 배접지가 결락되어 복장부(腹藏部) 또한 일부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다행히 사측의 협조로 복장물(腹藏物)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감색(紺色) 물을 들인 한지에 연화질(緣化秩)과 함께 이 탱화의 금어(金魚)가 진철(震徹), 봉화(奉化), 인순(仁珣)임과 ‘병신팔월일(丙申八月日)’에 제작된 것임을 밝힌 원문(願文)이 발견되었다. 원문에 표기된 병신년은 이 칠성탱이 양식상 19세기 불화 양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 조성연대를 1836년과 1896년으로 먼저 비정한 후 금어 생몰연대 살피기로 하였다. 뜻밖에도 진철은 19세기말 직지사, 통도사, 은해사, 해인사 등의 불화 제작에 관여한 화사이고 봉화, 인순 등은 1896년의 통도사 취운암(翠雲庵) 지장시왕탱을 제작한 이들이었기에 이 탱화 역시 1896년에 제작한 탱화로 가늠할 수 있었다.

화격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제작의 절대연대가 밝혀지고 낯익은 금어들의 이름에도 정이 끌렸지만 도처의 인물들을 묵서로 설명을 더해주는 아기자기함이 좋았다. 하루의 발품으로 화악의 풍광과 친절한 칠성탱을 느껴보시기를 염원한다.


▶ 문화재청 인천국제여객부두 문화재감정관실 최춘욱 감정위원





게시일 2008-07-14 16:3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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