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 중 성종대왕실록
( 이미지 출처 YTN)
만세!
일본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이 서울대학교로 인수되었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서인
조선왕조실록의 가치와 오대산 사고본의 의의에 대해서 필자가 한마디 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이 귀중한 서책이 돌아와서 기쁜
마음에 대해서는 두마디 세마디쯤 더해도 좋을 것이다.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아침부터 들떠서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았는데, 이를 국보 제151호에 추가지정하며, 26일부터는 일반에 공개한다고 하니 꼭
관람해보시라!
아직도 약탈당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 중 상당수는 이국(異國)을 떠돌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외규장각 고서이다.
정조대왕의 위대한 과업인 외규장각과 그 서책은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당시 프랑스 침략자들에 의해 불타버렸고 340여종 만이 남아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 정부와의 협상내용을 보면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은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이를 위해 여러 단체와 개인이
힘을 모으고 있으니 언젠가 우리나라로 돌아올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약탈한 문화재의 반환에 대해서는 우리도 그리 자유로울 수는 없는
입장이다.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국제교류가 활발하지 않았으며 제국주의 열강이 설쳐대던 시절 이후로 늘 약소국의 위치에 있었던 우리나라도
외국에서 약탈해온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 싶다.
실크로드의 악마들, 집을 떠난 문화재들
중국의 서쪽, 황폐한
타클라마칸 사막지역에서 최첨단 문명이 교류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唐)의 서역경략(經略)으로 실크로드의 전 구간이 개척된 이후, 상인들은 낙타 등에 바리바리 짐을 싣고 실크로드를 오갔다.
그 길을 오간 것은 사치스런 도자기나 비단, 금은보석, 칠기, 유리 등 물질적인 것뿐만이 아니었다. 실크로드를 따라 연단술(煙丹術)이나 제지술(製紙術)과 같은 첨단기술이 동방에서
서방으로 전해졌다. 또한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불교가 전해지는 등 종교와 학문, 예술의 교류도 활발하였다. 동아시아 문화의
황금기에 실크로드의 사막은 찬란하게 빛났다. 그리고 이 지역에는 아직도 금보다 귀한 유물이 다 발굴되지 않은 채 숨겨져 있다고
한다.
20세기 초, 이 인류 문명의 보고에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오렐 스타인,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 등의 '탐험가'들은 이 사막을 헤매고 돌아다니며 실크로드의 유물을 약탈해갔다.
이들은 학자도 아니었고 순수한 의미의 탐험가도 아니었다. 보물사냥꾼에 불과했던 이들은 석굴의 벽화와 귀중한 고문서와 보물을 뜯어갔다. 하지만
집을 떠난 문화재는 상당수 파괴되었고, 특히 2차대전 당시 독일로 옮겨진 유물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피터 홉커크의 저서 [실크로드의
악마들]에는 이들의 발굴과 약탈의 과정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홉커크의 표현대로 이들은 진정 악마들이었다.

키질석굴 제8굴. 높이가 6m에 달하는 비교적 큰 굴로 5-6세기 경에
만들어졌다. 천정과 입구의 윗부분에는 벽화가 남아있지만 중심의 큰 불상은 훼손되었다.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도 십여년에 걸쳐(1902-1914) 이 지역에서
무수히 많은 유적을 도굴해갔다. 승려였던 오타니(大谷 1876-1948)를 필두로 한 이
약탈꾼의 무리는 수준 높은 불교 유적을 도굴해서 조선으로 가져왔다. 탐험이 끝났으나 재정난에 처한 이들은 상인 구하라(久原)에게 유물의 일부를 팔았고, 구라하가 이 유물을 총독부에 기증하면서 경성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이후 전쟁에 패한 일본은 이 귀중한 서역 유물을 챙겨가지 못했고, 서울에 남아있던 오타니 컬렉션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면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오타니 컬렉션의 대표적인 유물을 한 점 살펴보자. 아래의 유물은 투르판(吐魯番) 아스타나 묘실의 천정에 붙였던 삼베그림이다. 중국신화의 창조신 복희와 여와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왼쪽의
볼빨간 여와는 컴퍼스를 들고 있고 오른쪽에 프링글스 수염이 난 복희는 자를 들고 있다. 다른 이야기로 여와가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었고 그들을
짝짓게 해서 인류를 번창하게 했다는 신화도 있다. 이들은 인간과 다른 존재로 하반신은 뱀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남녀의 몸이 얽혀있는 모양은
교접이나 다산을 상상하게 한다. 이 유물은 도안의 구성도 훌륭하며 채색상태도 양호한 걸작으로 꼽힌다.

복희여와도(伏羲女媧圖)
이 외에도 카라호자에서 출토된 바구니와 자수장식 주머니 등 후로 출토사례가 없는 희귀품이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석굴 벽을 뜯어 온 벽화와 고분에서
꺼내온 부장품과 생활용품, 불교와 마니교의 성화 등 동서문화의 교류를 증거하는 많은 유품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민병훈 학예연구관은 "현재 서역의 석굴사원에는 벽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독일이 수집한 벽화는 2차
세계대전 때 재로 변했다. 또 서역에 이슬람교가 전래된 후 이교도들이 석굴에서 생활하면서 벽화의 눈을 많이 훼손해, 그만큼 희귀한
유물이다."라고 오타니 컬렉션의 가치를 설명했다.
미술애호가의 입장에서 오타니 컬렉션을 중국으로 돌려보내기는 너무 아깝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문화재의 보존 문제이다. 귀중한
문화유산이 중국의 낙후한 박물관에서 파손될 가능성을 생각하면 차라리 우리가 이 유물을 보호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둘째로는 문화재의
효용성의 문제이다. 지적 문화적 수준이 높지 않은 중국인들 보다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보다 가치있고 의미있는 문화유산으로 향유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적어도 중국 전반의 문화적 수준이 어느 정도 성숙하게 되고 정부 차원의 문화재 관리 체계가 안정될 때 까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인류 전체를 위해서 더 나은 일이 아닐까?
아이러니하지만, 외규장각 도서를 반환하지 않는 프랑스의 입장도 이러할 것이다.
프랑스에서 보기에 우리나라는 남북대치 상태로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국가이며, 루브르 박물관에 방문하는 사람의 수는 남한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방문하는 사람의 수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유물의 보존 가능성이나 그 효용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이 유물은 프랑스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무수히 많은 문화재가 해외로 반출되었고 이에 대해 정확한 파악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오타니 컬렉션 쯤은 가지고 있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빼앗긴 유물의 환수를 원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물도 돌려주는 것이 옳다. 침략의
역사 속에서 큰 고통을 당했다고 해서 피해자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천 년의 역사 동안 아무리 많은 유태인이
학살당했더라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레바논 침공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남로당 사무총장 너부리님은 이에 대해 "전쟁 좀 하지 마라 변태들아" 라고 말한 바
있다.

무덤에서 출토된 7세기 초의 낙타용, 현재 보스톤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직접 오타니 컬렉션을 약탈해온 것은 아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우리 정부는
약탈의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고 따라서 반환의 의무도 회피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프랑스 정부에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구한다면, 오타니
컬렉션 역시 중국 정부로 반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유물은 일종의 장물이며, 집을 잃은 유물을 감금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을 합리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돌아왔기에 너무나 기쁜 마음이지만 즐거운 한편으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남의 소중한 문화재가 생각났다.
결자해지란 스스로에게 적용하기 참으로 어려운 덕목이다.
marilyn(marilyn@xddanzi.com)
> 기사원문보기: [삼천포미술관] 집나간
문화재들
* 본 기사는 남로당(www.namrodang.com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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